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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가대표 No.1 골키퍼였 던 로베르트 엔케 본문
이번 월드컵으로 다시한번 돌아보게 되는 비운의 축구선수가 있습니다. 바로 독일 국가대표 No.1 골키퍼였던 로베르트 엔케입니다. 예정대로라면 엔케는 지금 2010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에서 독일팀의 수문장으로 활약을 하고 있었어야 할 선수입니다만 그는 안타깝게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선수 입니다. 2살난 딸 라라의 죽음에 애통해 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축구선수 입니다.
2010 월드컵을 맞아 그를 기려보고자 엔케의 족적을 되짚으며 포스트를 써봅니다.
2010 월드컵을 맞아 그를 기려보고자 엔케의 족적을 되짚으며 포스트를 써봅니다.
엔케는 10대후반 분데스리가 보루시아 뮌헨 글라드바흐에서 축구선수로서 그의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21살 되던 해 포르투갈 벤피카로 이적하여 본격적인 골키퍼로서의 커리어를 쌓았고 2002년도엔 FC 바로셀로나로 이적하여 이후 바로셀로나의 제1의 골키퍼로서 많은 경기를 뛰었습니다. 하지만 바로셀로나는 다른팀과 다르게 골키퍼를 돌아가며 보는 로테이션이 있었고 이때문에 로베르트 엔케는 바로셀로나의 또다른 골키퍼인 발데스와 주전경쟁을 해야하는 복잡한 경쟁구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젊은시절의 로베르트 엔케]
이시절 엔케는 3부리그 약체팀과의 경기에서 3점을 실점하고 말아 엔케는 스페인 언론들로부터 그야말로 집중포화같은 실점에 대한 책임추궁을 받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엔케는 발데스와의 주전경쟁에서 밀려 벤치에서 구경만 하는 신세로 전락하였고 결국 엔케는 이를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뤼스티 레츠베르와 트레이드되어 페네르바체로 떠났습니다.
이적 후 첫경기에서 또다시 3점을 실점하면서 엔케는 사실상 이름뿐인 선수로 전락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2부리그로 내려가 그의 축구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엔케는 좌절감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며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가지 악재를 버티고 그는 다시 1부리그로 올라섭니다. 하노버로 이적한 그는 다시 주전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 입니다. 그리고 그와 아내 테레사 엔케와의 사이에서 그가 목숨보다 소중히 한딸 라라가 태어납니다.
라라의 탄생 이후로 엔케의 축구인생은 대 전환기를 맞이합니다. 좌절감과 우울증을 모두 털어내며 2006년 월드컵 독일 스쿼드에 이르러서는 올리버 칸, 옌스 레만과 함께 명실상부한 독일 No.1의 수문장으로 그렇게 그의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엔케와 딸 라라의 행복했던 시간]
하지만 그의 딸 라라는 태어날때부터 선천성 심장병을 안고 태어났습니다. 라라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줄곧 병원에 누워서 지내야 했고 그래서 엔케는 그의 아내 테레사와 함께 항상 병원에서 딸을 돌보며 지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이 시절 그는 언론에서 이렇게 인터뷰를 합니다.
"나에겐 힘들때에도 축구가있어서 이겨낼수 있다. 나에겐 90분이라는 현실도피의 시간이 있다. 하지만 나의 아내는 그럴수 있는 시간도 없으니까. 아내는 나보다 많이 힘들다."
그의 인터뷰는 자신의 빈자리에서 아내혼자 딸을 지켜보는것에 미안해했고 그것에 대한 깊은 고마움을 표했지만 사실 그는 아내 이상으로 철저히 딸의 곁을 지켰습니다. 중요한 경기도 포기하고 시간이 날때면 그는 오직 병원에서 그의 딸 라라의 손을 꼭 쥐고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사랑하는 딸 라라는 2006년 2월에 불과 2살의 어린나이로 안타깝게 그의 곁을 떠나고 맙니다.
앤케가 받았을 그때의 슬픔과 정신적인 충격은 충분히 짐작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저히 이 슬픔을 외부로부터 감추며 의연히(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이겨낸것으로 보였다) 그가 있어야 할곳,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2008년 그는 잠시 부상에 엔트리에서 제외되기도 했으나 결국 자타가 공인하는 독일 대표팀의 No.1에 올라서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엔케의 사망소식]
2009년 11월 11일 이른아침에 독일국민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바로 로베르트 엔케의 사망소식.
장래를 촉망받던 축구선수의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으로 독일 전역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던 딸 라라가 묻혀있던 묘지를 불과 몇걸음 사이에둔 기찻길에서 시속 160Km로 달리던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맙니다.(향년 32세)
이 시절 그는 언론에서 이렇게 인터뷰를 합니다.
"나에겐 힘들때에도 축구가있어서 이겨낼수 있다. 나에겐 90분이라는 현실도피의 시간이 있다. 하지만 나의 아내는 그럴수 있는 시간도 없으니까. 아내는 나보다 많이 힘들다."
그의 인터뷰는 자신의 빈자리에서 아내혼자 딸을 지켜보는것에 미안해했고 그것에 대한 깊은 고마움을 표했지만 사실 그는 아내 이상으로 철저히 딸의 곁을 지켰습니다. 중요한 경기도 포기하고 시간이 날때면 그는 오직 병원에서 그의 딸 라라의 손을 꼭 쥐고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사랑하는 딸 라라는 2006년 2월에 불과 2살의 어린나이로 안타깝게 그의 곁을 떠나고 맙니다.
앤케가 받았을 그때의 슬픔과 정신적인 충격은 충분히 짐작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저히 이 슬픔을 외부로부터 감추며 의연히(겉으로 보기에는 충분히 이겨낸것으로 보였다) 그가 있어야 할곳, 그라운드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2008년 그는 잠시 부상에 엔트리에서 제외되기도 했으나 결국 자타가 공인하는 독일 대표팀의 No.1에 올라서게 됩니다.
[갑작스러운 엔케의 사망소식]
2009년 11월 11일 이른아침에 독일국민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바로 로베르트 엔케의 사망소식.
장래를 촉망받던 축구선수의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망소식으로 독일 전역은 엄청난 충격에 빠지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던 딸 라라가 묻혀있던 묘지를 불과 몇걸음 사이에둔 기찻길에서 시속 160Km로 달리던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고 맙니다.(향년 32세)
[그가 몸을 던진 기찻길]
그는 죽기전 딸의 묘지앞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Lara papa kommt."
"라라야 아빠가 갈께."
"라라야 아빠가 갈께."
언론을 통해 알려진 엔케의 사망의 원인은 자살이었으며 그동안 알려진바와 같이 우울증을 극복했던게 아니었고 남들 모르게 지속적으로 우울증 치료를 받아왔다고 합니다. 또한 엔케는 딸을 심장병으로 잃고나서 새로운 딸을 입양해서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언론을 통해 익히 알려지고 있었어도 우울증으로 힘겨운 나날을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었다는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의 아내인 테레사 엔케에 따르면 그는 지난 6년간을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독일에선 우울증이 걸린 사람에게 입양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입양제한법이 있었으므로 그는 새로 입양한 딸 마저 다시 빼앗길까 두려워 철저히 자신의 우울증 치료사실을 사람들에게서 숨겨왔습니다.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수가..(없다)" - 미하엘 발락, 독일 대표팀 주장
그의 아내인 테레사 엔케에 따르면 그는 지난 6년간을 우울증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독일에선 우울증이 걸린 사람에게 입양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입양제한법이 있었으므로 그는 새로 입양한 딸 마저 다시 빼앗길까 두려워 철저히 자신의 우울증 치료사실을 사람들에게서 숨겨왔습니다.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수가..(없다)" - 미하엘 발락, 독일 대표팀 주장
이것에 대한 대답은 오로지 엔케 자신만이 알고있을 것이다.." - 티모 힐테브란트, 독일 골키퍼
"모든것이 싫다. 극도로 지쳤다. 미안하지만 나는 더 말을 할 수가 없다." - 레네 아들러, 독일 골키퍼
"엔케는 바르셀로나에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사망은 독일 축구계에게 큰 재앙이고,
이것은 바르셀로나도 마찬가지이다." - Txiki Bergiistain, 바르셀로나의 SD
"FC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엔케를 잃은것에 대하여 너무나 깊은 슬픔에 빠졌다.
내가아는 그는 매우 똑똑하고 의젓한 사람이었다." - Joan Laprta, 바르셀로나 구단주
2009년 11월 15일,
하노버 96의 홈구장인 AWD 아레나에서 엔케의 공식 장례식을 거행 하였습니다. AWD 아레나를 가득매운 4만5천명의 팬들과 미처 입장하지 못한 경기장 밖 수만의 인파가 그의 마지막 길을 지켜주었습니다.
[미망인 테레사 엔케]
독일 최고의 골키퍼 로베르트 엔케는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에서 독일팀의 수문장을 맏아 출전이 확실시 되었던 선수였으나 그는 생애 첫 월드컵출전의 영광을 버리고 홀연히 딸의 곁으로 떠났습니다.
독일팀은 출장하지 못한 그를 기려 이번 남아공 월드컵 첫경기인 호주와의 경기에서 엔케의 유니폼을 벤치 한켠에 고이 놓아두어 그를 기렸습니다. 또한 독일 축구협회는 2010년 1월 16일. 엔케의 이름으로 독일 축구협회와 분데스리가, 엔케의 소속팀이었던 하노버96이 힘을모아 우울증 치료를 위한 의학재단을 설립 하였습니다.
독일팀은 출장하지 못한 그를 기려 이번 남아공 월드컵 첫경기인 호주와의 경기에서 엔케의 유니폼을 벤치 한켠에 고이 놓아두어 그를 기렸습니다. 또한 독일 축구협회는 2010년 1월 16일. 엔케의 이름으로 독일 축구협회와 분데스리가, 엔케의 소속팀이었던 하노버96이 힘을모아 우울증 치료를 위한 의학재단을 설립 하였습니다.
[독일팀은 2010년 월드컵 호주전을 엔케와 함께 뛰었다.]
[사랑하던 딸 라라의 묘에 합장 된 로베르트 엔케. 이로서 엔케와 라라는 영원히 함께하게 되었다.]
로베르트 엔케.
딸 라라와 아픔없는 곳에서 영원히 함께하기를..
딸 라라와 아픔없는 곳에서 영원히 함께하기를..
"엔케는 우리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
[독일팀 감독 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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