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닷컴] (글=이동진) 5월23일 폐막한 제63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은 영화 ‘시’는 보고 난 뒤에도 새록새록 생각나는 영화다. 극장을 나선 직후에는 그 쓸쓸한 감동을 홀로 간직한 채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뛰어가고 싶게 만들지만, 며칠이 지나면 결국 내가 느낀 것과 다른 이가 느낀 것에 대해 한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칸으로 떠나기 전, 이창동 감독을 만났다. 5시간 동안 지속된 그와의 긴 인터뷰는 ‘시’가 얼마나 훌륭하면서 깊은 작품이고, ‘시’를 만든 감독이 얼마나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철저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에게 엄격한 연출가인지를 새삼 절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모름지기 이창동 감독의 작품들에 담긴 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사르는 영화 연금술의 대가(代價)로, 예술가가 바깥 세상을 향해 간신히 토해내는 보석 같은 생(生)의 물음일 것이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서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시'의 감독 이창동. ⓒ 이동진닷컴-사진가 김보배 |
-‘시’는 ‘밀양’에 이어 두번째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작품입니다. 칸 영화제에 임하는 감독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요.
“믿거나 말거나, 저는 영화제에 나가는 게 참 싫어요. 고민 아닌 고민이죠. 이상하게 이번에는 외통수로몰리는 듯해요. 칸 영화제가 아니면마케팅이 잘 안 되는 영화를 만든 것같은 자괴감이 있어요. 어떻게 해볼도리가 없습니다. 의도가 없었는데도 개봉이 5월로 잡힌 것도 그렇고요.”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 ‘밀양’의 국내 상영 때 적잖은 도움이 되었던 게 사실이었는데요.
“맞아요. 사실 ‘하녀’나 ‘괴물’ 혹은‘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같은 작품들은 칸 영화제 출품이 그냥 덤 같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우리에겐 전혀 그렇지 않죠. 원치 않은 방향으로가고 있는 것 같아서 저도 싫어요. ‘시’ 예고편에서 칸 영화제를 상기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카피들이사실 제게는 무척이나 낯 뜨겁기도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그것 밖에 방법이 없으니 열심히 칸이라도 활용해야지요.”
-‘시’의 이야기는 두 가지 모티브를엮고 있습니다. 하나는 손자와 함께어렵게 살면서 시를 쓰고 싶어하는 할머니에 관한 내용이고, 또 하나는 같은 학교 남자 아이들에게 성폭행 당한 뒤 여자 아이가 자살하는 것이죠. 영화 ‘시’는 이중에서 두번째 모티브로부터 처음 출발한작품이죠?
“그렇습니다. ‘밀양’을 준비할 때 그런 뉴스에 접하게 됐어요. 그때 고민이 좀 됐죠. 이런 사건이 발생한 도시에서 영화를 찍으면서 현존하는 사실을 피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어요. 물론 그런 성격의 사건은 우리나라의 다른 곳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그 도시만 그런 것은 분명히 아니죠. 하지만 그게 엄연히 실제 벌어진 현실인 상황에서, 거기로부터 눈을 돌려 약간 초월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제 스스로 납득이 되질 않았던 거에요. 그래서 ‘밀양’ 프로젝트를 아예 엎을까도 고려했고, 실제로 그 때문에 잠시 쉬기도 했어요. 왜냐면 ‘밀양’이라는 영화가 제기하는 중요한 물음 중 하나가 일상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런 현실이 일상이란 말이니까요. 그렇게 꽤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원래대로 하게 되었던거죠. 그런데 불필요한 의무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도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다뤄야겠다고막연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그 사건이 저를 계속 찔렀다고 할까요.”
-그 사건의 어떤 측면이 감독님을 찔렀던 걸까요.
“굳이 이야기하면 도덕성이겠죠. 일상의 도덕성 말입니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사후처리를 하는지는 거대 담론에 비하면 무척이나 사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이례적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건 사회 전체의 도덕성과 관련이 있어요. 제겐 그런 본능적인 느낌이 있었던 듯합니다.”
-그런 문제의식이 어떻게 시를 배우려는 노년의 여성 이야기와 결합되게 된 건가요.
“어떻게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 처음엔 잘 모르겠더라고요. 몇몇 익숙한 구조가 있을 수있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도쿄에 갔을 때 한밤 호텔 방에서 텔레비전을보면서 자연 경관과 명상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는 프로그램에 접하게 됐어요. 아마도 잠 못 자는 여행객들을 위한 채널이었던 것 같아요. 그걸 무심코 보다가 ‘시’라는 제목이 생각나면서 60대 중반의 여주인공이 떠오르더군요. 손자를 혼자 키우면서 시를 처음 쓰게 되는 여성이었죠. 그 순간 ‘아, 이걸 하면 되겠구나’ 싶어서 그 사건과 합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시’는 그렇게 시작된 거에요.”
-60대 여성이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시’에는 정말 20대 캐릭터는 주-조연을 통틀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더군요. 이런 한국영화도 거의 없을 거에요.(웃음)”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요.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30대도 없군요.그 많은 시 동호회 회원들 중에서도 없고요. 거, 참.(웃음)”
-‘밀양’과 달리 ‘시’에는 다음 세대에 대한 근심과 책임감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극중 ‘다음 세대’가 아들과 딸에 해당하는 바로 뒷세대가 아니라 손자 손녀에 해당하는 두 세대 뒤의 세대라는 거죠. ‘시’의 이야기는 왜 그렇게 설정되어 있는 걸까요.
“내가 남겨두고 가는 그 무엇은 아들이나 딸보다는 손자일 때 느낌이 더 강한 듯해요. 자식과의 관계에서는 사실 애증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데 손자는 내 뿌리라는 느낌이 확실히 들죠. 저는 아직 손자가 없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뭘 남겼지?’ 싶은 느낌이 있잖아요? 내가 남긴 게 괴물이 아닌가 싶은 거죠. 새로운 세대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서 당황하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경험일거에요. 그게 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세대가 어떻게 살아갈까에 대해 당혹스러운 느낌이 드는 거죠.”
-아닌 게 아니라 ‘시’에는 그런 당혹감이 미자(윤정희)의 심리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습니다. 미자가손자를 이해하게 되는 것을 다루려면, 그 사건을 저지른 손자의 생각과 마음 상태에 대한 설명이 영화에 등장해야 하는데, 그걸 생략하셨죠.
“손자인 욱이가 그런 범행을 저지른 소년이지만, 그 아이에 대해 특별히 뭐라고 규정을 하지 않는 게좋겠다고 봤어요. 결손가정이라서 어떻다는 둥, 평소 특정한 생각을 가져서 그렇게 됐다는 둥 설명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욱이가 어떤 아이인지 규정하기 힘들 정도로 평범해 보이지만, 딱 그 정도로만보여주고 싶었어요. 그저 잘 모르겠다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신세대인 거죠. 이건 특별한 배경을 가진특별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에요. 사실 욱이가 자신이 저지른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는지 어떤지는 알 길이 없어요. 실제로 10대 아이들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몰라요.”
-실제 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쳐 보셨잖습니까.
“네, 그렇죠. 하지만 아이들은 봐도 몰라요. 그건 아마도 그 속에 뭔가가 없으니까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거에요. 아이들은 빈 그릇 같은 존재라고 봐야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자는 자신에게 귀책이 있으니까 책임을 져야 하는 거죠. 욱이는 미성년자니까, 당연히 부모를 비롯한 보호자에게 책임이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