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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 인터뷰 본문

Chisme/Interviews

송창식 인터뷰

WhiteApple 2010. 11. 30. 06:20

송창식 

“한번쯤, 고래사냥, 왜 불러, 가나다라… 대중하고 ‘똥창’이 맞아 히트한 거지, 우리식이니까”

[한상진 기자의 ‘藝人’ 탐구 ②]


한상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쿵푸화에 팬티 입고 빙빙빙…목표는 1만일, 매일 2시간씩 돈다 
● 빙빙빙 못 돌까봐 16년째 외국에 안 갔다 
● 눈뜨자마자 변기에 앉아 기계매뉴얼 소리 내 읽으며 발성연습 
● 부인은 코리아게이트 주역 박동선씨 소개해주려 했던 여자 
● 전생(前生)을 본다. 조영남은 나의 가정교사였다 
● 무대의상 한복은 모두 보광동 세탁소 아주머니 작품 

 
 

가수 송창식(63)은 기인(奇人)이다, 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분위기도, 노래도, 옷차림도 그렇다. 도사(道士)와 비스름하다. 그런 송창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할 얘기가 없단다. 그래도 졸랐다. 겨우 허락을 받아냈는데 오라는 시간이 밤 12시였다. 머리가 아팠다. 겨우 사정을 해서 시간을 밤 9시로 당겼다. 

인터뷰는 새벽 3시가 넘어서 끝났다. 정확히 말하면 2시경 인터뷰가 끝났고 나머지 한 시간가량 그가 노래를 불렀다. 엄청 비싸다는 스피커 때문은 아니다. 온몸에 전율을 느낀 이유가. 머리칼이 쭉~ 섰다. “노래 잘한다”는 말도 안 나왔다. 

인터뷰를 시작하자 그가 걱정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해보면 알겠지만, 내가 인터뷰 내용이 별로 일반적이지 않아요. 일반적인 인터뷰를 해달라 그러면 아주 졸작이 나온다고요. 보통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이 나한테는 현실감이 없어요. 무슨 생활 얘기를 하자고 하면 잘 못해줘요. 왜냐면 가짜 얘기를 해줘야 되니까.”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알아요”라고 대충 답하고 그냥 시작했다.


그는 얼마 전 MBC 예능프로 ‘놀러와’에 나와 ‘웃겼다’. 이게 처음 출연한 예능프로라고 했다. 음악프로말고 방송에 나간 것은 처음이라고. 아내를 위해 수상가옥을 10년째 짓고 있다거나, 3년간 노숙생활을 했다는 얘기를 해서 시쳇말로 ‘뒤집어졌다’.



▼ 예능프로에 출연하신 이후 화제가 됐어요.


“그렇더라고. 나도 깜짝 놀랐어요. 그냥 계속 웃기만 했는데, 내가 농담을 못 하는 건 아닌데 내가 하는 농담의 종류가 조금 일반적이지 않다고요. 그래서 방송에 별로 적합하지 않아요, 내가.”


▼ 밤 12시에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좀 당황스러웠어요.


“나는 뭐 완전히 쌩쌩할 때지. 그런데 요 며칠 내가 잠을 잘 못 잤어요. 원래 4시에 자서 (오후) 2시쯤에 일어나야 되는데, 지금 막 졸려 죽겠고 그래요.”


▼ 낮밤을 바꿔서 사시는데, 그렇게 살기 힘든 일도 있잖아요,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은 없어요. 그런 일을 안 만드니까. (생활패턴 바꾸는 일은) 난 무조건 안 해요. 나는 그런 일을 안 만들거든.”


▼ 오전에 누굴 만나야 된다거나, 어딜 꼭 가야 된다거나 하는 일이요.


“나는 그런 일이 안 생긴다니까. 약속을 안 하니까.”


알려진 얘기지만 그는 낮밤을 바꿔서 산다. 새벽 2시를 14시라고 한다. 어지간해서는 생활 패턴을 바꾸지 않는다. 언젠가 친구인 가수 윤형주씨의 딸이 결혼할 때 한번 낮 시간에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아주 드문 경우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안 갔다. 그는 또 약속을 중시한다. 가수로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도 친구와 선약이 있으면 방송에 안 나갔다. 그것 때문에 ‘괴짜’라고 소문이 났는데, 신경 쓰지 않았다.


“약속은 내게 있어 똑같은 거니까, 이 약속이나 저 약속이나. 근데 보통사람들은 가수니까, 이제 방송이 더 중요하니까, 전화해서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지 않으냐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다 똑같지.”


▼ 새벽 4시에 자서 오후 2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언제부터 하셨어요?


“옛날 통행금지 있을 때부터 한 거니까. 통행금지라는 게 (새벽)4시에 해제됐으니까, (밤)12시부터 4시까지가 가장 조용한 시간이니까, 그때는 깨어 있어야 됐다고요. 작업을 하려면.”

김연아처럼 돈다


▼ 오후 2시 이후에도 전화를 꺼놓으셨던데. 저녁이 되어서야 켜시고.


“내가 2시쯤 일어나면 혼자 5시간 동안 뭘 해요. 아무도 내 얼굴을 못 본다고. 그 시간에는.”


▼ 뭐 하시는데요.


“운동하고 연습하고 그런 게 다 합해서 5시간쯤 걸려요.”


▼ 댁에서요?


“예, 우리 집에서, 일어난 자리에서 하는 거니까. 팬티 바람으로.”


▼ 무슨 운동을 일어난 자리에서 팬티 바람으로 합니까.


“일단 일어나서 1시간 정도를 화장실에서 소비를 한다고요. 왜냐하면 나는 읽을 기회가 그때밖에 없으니까. 뭘 하나 갖고 들어간다고, 읽을거리를. 그래 갖고 일단 좌변기에 앉아서 읽어요. 그게 대충 1시간이에요.”


▼ 주로 뭘 읽으세요?


“아무거나, 누가 자기 책 썼다고 줬다거나, 시집이나, 뭐든지. 아니면 기계매뉴얼이라든지.”


▼ 기계매뉴얼이요?


“그럼요. 좌우간 뭐든지 읽을거리를 갖고 들어가요. 건축에 대한 공부를 한다든지, 뭐 이런, 읽을거리는 항상 많지요. 중요한 건, 크게 소리 내서 읽을 때도 있다고요, 연습 삼아. 그게 종류가 뭐든 관계없이. 그걸 하지 않으면 혀가 잘 안 돌아가는 날이 있거든요.”


기계매뉴얼을 들고 변기에 앉아 큰소리로 읽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 그 다음에는요.


“운동하는 데 2시간이 걸려요. 난 한자리에서 빙빙빙 도는 운동을 2시간씩 해요. 매일.”


▼ 돌아요? 2시간을?


“예, 계속 빨리 도는 건 아니고, 천천히 돌다 빨리 돌다 하는 거지만, 8㎞ 정도 돌아요. 그럼 2시간 걸려요.”


▼ 빙빙빙 도는 게 운동이 됩니까?


“그게 운동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한번 돌아보면 알아요. 왜냐하면 현재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운동 중에 그것보다 나은 운동은 지구상에 없어요. 운동 되는 것 중에, 왜 그러냐 하면,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 일단 척추하고 경추하고 32개가 따로따로 풀릴 수 있고, 도니까. 비틀려 도니까. 또 원심력에 의해서 피가 바깥으로….”


▼ 그렇겠네요. 팔을 벌리고 도니까.


“빨리 돌 때 팔을 벌릴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손가락 끝을 가리키면서) 나중에는 이게 이~만해진다고, 피가 몰려서.”


▼ 그 정도가 되려면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도셔야 될 텐데.


“그렇죠, 한 10분쯤 빨리 돌면 그렇게 되지. 보통 네 발짝에 한 바퀴를 도는데 그러면 1분에 보통 160발짝 정도 뛴다고요. 그런데 빨리 돌 때는 1분에 한 250발짝, 뭐 이렇게 빨리 가요. 김연아처럼 도니까, 빨리 돌 때는. 한 발에 한 바퀴씩은 돈다고요. 헐떡거리니까 유산소운동도 되고.”(웃음)

▼ 땀도 많이 나겠네요. 

“삐질삐질 나지요. 왕창 나는 만큼은 안 해요. 그거는 안 좋은 운동이니까.” 

▼ 어디서 배우셨어요? 생전 처음 보는 운동인데. 

“처음 보겠지만 옛날에는 많이 했어요. 이게 전통운동이라고 사실은. 무술이 곧 밥이던 옛날에.” 

▼ 무술이 곧 밥? 그건 또 무슨 얘긴가요. 

“예, 그럴 때가 있었다고요, 무공이 곧 밥일 때가. 힘만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때, 그 당시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게 바로 도는 거였어요.” 

▼ 그때는 언제를 말씀하시는 것인지. 

“그 시대는 2000년쯤 전에? 무예의 기본이 도는 거란 말이지. 그리고 왜 그 운동이 좋으냐 하면, 조깅 같은 거는 비 오면 못 하잖아요. 그리고 (조깅은) 한번 나가면 결국은 다시 돌아와야 되잖아요, 아무리 피곤해도. 그런데 이거는 하다가 컨디션이 안 좋아서 피곤하면 1시간 하고 끝내요. 그럼 되는 거지. 나는 많이 돌 때는 뭐 6시간 이렇게 도니까. ‘오늘 좀 돌아야지’ 하고 마음먹으면.”(웃음) 

▼ 빙빙 도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신 건 언제부터죠? 

“이제 5000일 넘었으니까, 내가 1만일 잡고 하는 거거든요. 1만일이면 30년이잖아요.” 

▼ 30년이요? 

“예, 1994년부터 돌았으니까.” 

▼ 처음 돈 날 기억하세요? 

“1994년 3월4일부터 돌았어요. 기왕에 시작한 거 1만일은 해야겠다 그거지.”


▼ 그럼 그때부터 하루도 안 빼놓고 지금까지.


“그럼요, 하루도 안 빼놓고 하는 거지요. 아니면 1만일이 안 되는 거니까. 이걸 우선으로 해요. 최우선으로다. 외국도 그래서 안 가는 거야. 외국 나가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까.”


▼ 1994년 이후로 한 번도 안 나가셨어요?


“한 번도 안 나갔어요.”


▼ 빙빙 도는 운동 때문에?


“예.”


이런 대화는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분위기를 알 수 없다. 약간은 당황스럽고 기가 찼다. 송창식씨에게 미안하지만 기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아~ 이래서 평범한 인터뷰가 안 된다고 했구나’하고 이해가 됐다. 그래도 멋있었다. 쟁이의 냄새가 나서.


“운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특히 중국은 그래서 안 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그 나라에 뭐 내 뜻과 관계없이 못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을까봐, 그런 나라는 안 가고, 미국도 왜 안 가냐면 가는 날은 하루를 이익 보는데 오는 날 하루가 그냥 없어진다고요.”


▼ 아~ 시차 때문에.


“미국 가서 유럽으로 해서 돌아오기 전에는 못 하는 거야.”

▼ 그렇겠네요. 비행기 안에서 돌 수도 없고.


“그렇지, 비행기 안에서 돌 수도 없고.” 

가로 4m, 세로 4m


▼ 가수 조영남씨가 방송에서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공연을 하게 되면 선생님께서 가로 4m, 세로 4m 공간을 요구한다던데.


“지방 공연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저녁 7시까지는 못 움직이니까. 지방공연 때는 여기서 못 가요. 왜냐면 여기서 저녁 7시에 나가서 비행기 타고 가면 이미 공연은 늦으니까, 그 전날 내려가야 된다고요. 전날 내려가면 숙소가 필요한 거지. 운동을 할 수 있는 숙소.”


▼ 그게 준비 안 된 곳엔 안 가세요?


“안 가요.”


▼ 혹시 그게 준비가 안 돼서 공연을 못 한 적도 있나요?


“많지요. 옛날에 ‘열린음악회’를 약속했는데 그것 때문에 돌아왔지. 저녁 6시에 와야 된다는 거예요. 근데 그 시간은 내가 약속을 못 하거든요. 아무리 빨라도 5시에 나와야 되니까. 그래서 ‘6시는 약속을 못 한다. 그러니까 숙소를 해줘라. 서울 여의도에다.’ 그러니까 프로듀서가 ‘알았다’ 하고 갔어요. 약속을 했지. 그런데 여의도 호텔방에 딱 갔더니 (손으로 사각형을 그리며) 이만한 거예요. 그래서 도로 갔어요. 사람들은 내가 펑크를 낸 것처럼 얘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게 없으면 난 공연을 못 한다고.”


▼ 근데 왜 굳이 4m, 4m입니까?


“아~ 돌다보면 팔이 부딪히거든, 이게 공전과 자전을 한다고, 가운데서만 도는 게 아니고 이렇게 이렇게 돈다고요.”


그가 도는 시범을 보였다. 팔을 펼치고 자유롭게 도는 모습을, 마치 새가 날 듯이.


▼ 그동안 해외에서 공연 제안을 많이 받으셨을 텐데.


“무지하게 많이 받았지. 그래도 한 번도 안 갔어요. 세상에 더 중요한 건 없어요. 당장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게 중요한 거지. 이게 말하자면 1만일이라는 작품을 하는 건데, 작품이 안 끝났잖아요. 이건 그리고 하루 삐끗하면 1만일은 없어지는 거라고요.”


▼ 중국은 그렇다치고 일본은 갈 수 있지 않나요? 당장 전쟁이 날 것도 아닌데.


“아~, 그건 왜냐하면, 일본은 그만한 방이 있으라는 보장이 거의 없고, 또 바닥이 거의 다다미인데 내가 돌면 그 다다미는 다 뜯어져요. 바닥은 완전히 해져버린다고.”


▼ 아니, 뭘 신고 도시는데 바닥이 뜯어져요?


“보통 쿵푸화 신고 돌죠.”


▼ 쿵푸화요?


“예, 바닥이 가죽인 거, 잘 미끄러지는 거. 밖에서 돌 때도 있어요. 밖에서 돌 때는 트레이닝복 입고 돌아도 돼요. 대신 천천히 돌지. 내가 보통 집에서 도는 운동은 팬티 바람으로밖에 못 돌아요.”


▼ 그건 또 왜 그러세요?


“왜냐하면, 빨리 돌 때 옷이 걸리면 찢어져요. 옷이 걸리면 넘어지거나 찢어진다고. 퍽 하고 뜯어진 적이 있다고. 이게 빨리 도니까.”


▼ 지금은 달인이시겠네요.


“그렇지는 않아요. 아직도 100평짜리 실내에선 못 돌아봤어요. 100평짜리 실내에서 한번 돌아야 될 일이 있어요, 내가 느낌상. 그거를 최소한 한 달은 해야 될 거 같아요. 꽹과리 치면서 상모 돌리는 사람들이 공중에서 도는 거 있잖아요. 그걸 할 장소가 없는 거야, 내가.”

▼ 댁에서는 못 하시겠네요.


“못 하지요, 그거는. 뭘 걷어찰지 어떻게 알겠어요? 솟구치면서 도는 걸 해야 되는데, 일단 천장이 (낮아서).”

인터뷰 장소는 경기 구리시에 있는 송창식씨의 개인 스튜디오다. 지하실인데 천장이 꽤 높았다. 하지만 송창식씨는 그 천장을 가리키며 “이것보단 높아야 된다”고 했다. 기자 눈에는 꽤 높아 보였는데. 

100평에서 솟구치고파


▼ 여기보단 높아야 되나요?


“(천장을 쳐다보며) 원래 사람이 이만큼 높이 못 뛴다고요. 원래 못 뛰는데 이러고 운동하다보면 무슨 일이 날지 모른다고요. 이게 기가 막 솟구치는 거니까. 그러니까 조심스러워서 못 하는 거지요.”


▼ 일어나서 한 시간은 화장실, 두 시간은 운동, 나머지 2시간은 뭐하세요.


“연습하지요. 음악, 기타. 기타를 매일 안 치면 (실력이) 줄어요. 스트로크를 나 정도 하는 사람은 하루만 안 치면 다음날 줄어요. 이게 벌써 몸이 안 풀려 있으니까. 지금 나이는 더 나쁜 게 집에서 이렇게 기타를 2시간씩 치고 공연 가잖아요? 거기서 앉은 자리에서 또 풀어야 돼요, 몸을. 아니면 무대에 올라가서 잘 안 쳐져요.”


송창식은 지금도 매일 기타의 기본박자를 연습한다. 연습실에 노트북이 하나 있는데, 이 노트북에 정확한 박자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깔아놓고 거기에 맞춰서 기타 치는 연습을 한다고 했다.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고 기본박자를, 50년 이상 기타를 친 거장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60년 기타 친 사람도 박자를 못 맞춰요. 이거 틀어놓고 맞춰보라 그러면 한 번도 안 맞는다고. 한 번도 그렇게 (연습을) 안 했으니까. 정확한 소리를 내는 연습을 하는 건 사실 음악하고는 관계없는 거예요. 말하자면 운동이에요. 소리 내는 운동이라고요. 운동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작아지는 운동일수록 좋은 운동인 거예요. 우리가 막 움직여 가지고 트레이닝을 하잖아요? 크게 보면 그게 다 주기적인 진동을 말하는 거예요. 그게 작아질수록 좋은 운동이라고. 물론 그것도 참선이나 좌선만은 못 하지만.”


▼ 참선이나 좌선도 하세요?


“배운 건 아니고, 어릴 때 노숙을 하면서 터득했지, 방법을. 한 3년간 노숙하면서. 겨울에 노숙을 하려면, 지금은 뭐 지하철 같은 데 가서, 따뜻한 곳 찾아서 잘 수 있지만, 그때는 지하도 같은 데 들어가면 쫓아냈어요, 경비들이. 그러니까 밖에서 자려면 조그만 데라도 찾아 들어가서 자야 돼요.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몸을 최대한으로 줄인 상태에서 숨을 가늘게 쉬어야 돼요. 최대한으로, 숨을 크게 쉬면 찬 공기가 들어오니까. 조금씩 내보내고 조금씩 집어넣는다고. 내가 그러면서 명상을 배웠지. 참선을 그렇게 터득했어요. 거의 숨을 쉬지 않는 수준으로.”


▼ 거지생활 하면서.


“그거 때문에 건강이 유지된 거죠.”


▼ 왜 노숙을 하신 거예요? 서울예고도 다니셨는데.


“레슨비를 못 내서 2학년 때 낙제를 했잖아요. 그길로 그만뒀어요. 그리고 노숙생활 하고 다녔지. 그리고 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집을 나간 집에서 내가 컸어요. 할아버지, 삼촌 집을 왔다갔다 했어요. 그래도 공부는 톱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내가 검·판사 되는 줄 알았으니까. 예고도 톱으로 들어갔으니까. 예고에 간다고 하니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완전히 반대했지. 서울음대 가면 확실하다고 그랬다고.”


▼ 예고에는 왜, 어떻게 들어갔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작곡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말하자면 소질이 있었다고요, 내가. 꿈이 지휘자였고. 그러다 예고라는 게 있다는 얘기를 듣고 들어갔지. 그리고 내가 군경유자녀였으니까. 원하는 곳에 들어가기 좋았지. (군경유자녀는) 학교 커트라인에 맞으면 들어가는 거예요. 유자녀는 특권이 뭐냐면, 고등학교 3군데를 지원할 수 있었어요.”

▼ 어디 어디 지원하셨어요. 3군데를.


“1지망 서울예고, 2지망 경기, 3지망 서울 이렇게. 예고는 실기에서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공부는 자신 있었으니까. (예고 떨어져도) 경기, 서울은 간다 그러고 한 거예요.”


▼ 전공은 뭘 하셨어요?


“성악을 했지. 내가 인천에서 중학교 때 경기도 콩쿠르 나가서 1등 없는 2등을 한 적이 있거든요. 한번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어도.”


▼ 배운 적이 없는데 어떻게 불러요.


“그냥 악보 보고 부른 거지. 1등은 줄 수가 없었지. 나보다 잘하는 놈은 없었으니까. 난 내가 노래를 무지하게 잘하는 줄 알았지 뭐야. 근데 예고를 딱 갔는데, 내 노래는 노래도 아닌 거야. 왜냐? 그때 처음으로 레슨이라는 걸 선생님이 해주는데, 대가들이 레슨을 해주는데 쫓아갈 수가 없는 거예요.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니까. 그러다 낙제하고 그만뒀죠. 근데 학교에선 나를 퇴학 안 시키고 조기졸업으로 처리해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한 위 기수 동창회에 들어가 있다고요.”


▼ 낙제 덕분에 조기졸업을.


“그렇지.”(웃음)


송창식은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한다. 학교 다니는 친구들 찾아다니며 밥 얻어먹고 살았다. 친척집을 전전했다. 동냥질을 했고 이것저것 많이 훔쳐 팔았다. 영리했던 송창식은 당장 먹을 것을 훔치기보단 팔아서 돈이 되는 것을 주로 훔쳤다. 철물점의 망치 같은 게 좋았다. 그렇게 도둑놈, 거지 생활을 하다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훔친 서울대 배지


“1967년 봄 어느 날 정신을 번쩍 차린 거예요. 내가, 이렇게 살아가지고 되겠냐고 말이지. 내가 당시에 해태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돌로 만든 해태 모형 있잖아요. 호텔 같은 데 가면 ‘어서 오십시오’ 써 있는 거. 그만두고 바로 무전여행을 떠났어요. 부산행 열차를 타고. 갖고 있던 전 재산 50원으로 엽서를 사서 친구들에게 무전여행 간다고 보내고는.”


송창식의 무전여행은 40여 일간 이어진다. 기차를 몰래 타고 가다가 걸리면 얻어터지고 내려서는 동냥질을 했다. 헛간을 빌려 눈을 붙였다.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었다. 부산까지 가는데 15일이 걸렸다. 부산에선 조리기술을 가진 웬 양아치를 만나 같이 다녔다. 그 양아치를 따라 밀양에 가서 중국집에서 얼마간 일했다. 면 뽑는 기술을 익혔다. 당시 송창식은 누군가에게서 훔친 서울대학교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녔다. 무시 안 당하려고, 그걸 달고 구라를 쳤다. 사람들은 “서울대생이 무전여행을 하는구나”하며 기특해 했다. 무전여행을 하면서 송창식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그때 정리한 생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했다.


▼ 어떤 결심인데요.


“최고의 인생을 사는 거지요. 위인으로. 그전까지는 정말 되는 대로 살았지. 사는 동네도 빈민굴이니까, 친구들이 다 양아치들이에요. 그냥 지나가는 여학생 잡아다가 강간하고 그런 놈들이었다고. 난 절대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지.”


▼ 무전여행 끝내고는 서울로 오셨어요?


“밤에는 건축현장에서 야방(경비)을 보고 낮에는 홍익대 잔디밭에 가서 노래를 불렀어요. 기타 치면서. 친구가 그 학교를 다녔거든요. 그러다가 음악감상실 쎄시봉 주인을 만났어요. 그 사장은 홍익대 다니던 이상벽씨 따라서 놀러 왔다가 날 봤지. ‘홍대 대표로 우리 감상실에 와서 하루 출연하라’ 이러는 거야. 그래서 쎄시봉에 간 거예요. 대학생인 척하고는.”

‘쎄시봉’은 우리나라 음악감상실의 효시와도 같은 곳이다. 1960년대 통기타 가수라면 누구나 거치고 싶어했던 무대였다. 송창식, 조영남, 윤형주, 김도향, 서유석, 김세환 등이 이곳에서 배출됐다. 

▼ 우연이었네요.


“거기서 윤형주, 이익균이랑 트리오쎄시봉을 만들었어요. 근데 내가 살아온 게 그러니까 얼마나 나쁜 버릇이 몸에 많았겠어요. 일단 안 씻고, 이도 많고. 입만 벌리면 구라 치고.”


▼ 주로 무슨 구라를 치셨어요.


“쓸데없는 구라예요. 나는 이래도 우리 집 가면 무지하게 부자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구라지. 하여간 쎄시봉 간 뒤로 난 노숙을 안 해도 됐지. 그리고 팝송을 배운 거예요. 거기에 매료됐지.” 

쎄시봉, 조영남, 윤형주


▼ 당시 쎄시봉에서는 조영남씨가 가장 유명했나요?


“그 양반은 당시 대한민국 최고 가수였어요. 노래 잘하기로는 최고였다고요. 내가 영남이형 때문에 팝송에 흥미를 느꼈어요. 그리고 내가 구라 치다가 영남형한테 한 대 터졌어요, 난롯가에서.”


▼ 난롯가에서?


“난롯가에서 밤새 얘기하다가. 우리 집 부자라고 구라 치는데 그냥 손이 날아 온 거야. 그런데 코피가 찍~ 난 거지. 그러니까 본성이, 딱 양아치 본성이 나온 거지. 근데 양아치들 근성 제일 기초가 뭔 줄 알아요? 불리할 때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 거야. 딱 보니까 나는 객식구고 여기는 쎄시봉이고, 그래서 일단 ‘잘못했습니다’ 그랬지. 그러고 나서 조용히 나가서 예전에 나를 때렸던 놈들한테 전화를 했지 뭐예요, 3년 만에. ‘야, 여기 손볼 놈 하나 있다’고.”(웃음)


▼ 누가 왔어요?


“다음날 인천에서 두 놈이 올라왔는데, 쌍둥이라고, 나도 무서워하는 놈들이 올라왔어요. 걔들은 ‘이게’ 아니고 ‘이거’예요.”


앞의 ‘이게’는 주먹이고 뒤의 ‘이거’는 칼이다. 송창식씨는 칼로 찌르는 흉내를 내며 설명했다.


▼ 칼 쓰는?


“칼도 아니고 긴 대못을 망치로 두드려서 만든 칼, 친구들하고 시비 붙어도 그걸 쓰는 놈들이라니까.”


▼ 조영남씨 죽을 뻔했네요.


“영남형은 자기가 그런 위험에 처한 걸 몰랐지. 내가 인생을 쭉 살면서 보면 계속 (나한테) 딴죽을 거는 형이 있는데 그게 영남형이에요. 그런데 그게 나한테는 아주 최고의 약이 됐어요. 일단 그 일 이후로 구라 치는 버릇이 없어졌고.”


송창식은 조영남을 두고 “내 인생 내내 딴죽을 거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다보니 일종의 콤플렉스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연이 오래된 만큼 사건도 많았다. 들어보니, 솔직히 좀 유치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언젠가는 김도향씨가 나한테 ‘너는 건강을 어떻게 유지하냐’고 그래요. 그래서 단전호흡을 하는데 가르쳐주지는 못한다고 했지. 난 노숙하면서 배웠는데, 형한테 노숙하라고 할 수도 없고. 김도향씨가 하루는 단전호흡 하는 젊은 친구를 데려왔어요. 한번 봐달라고, 그래서 봤더니 방법이 좋아. 그래서 같이 했죠. 동생인 김세환한테도 연락을 했지, 같이 하자고. 근데 내가 선택을 잘못한 거요. 하루는 운동하자고 만나서는 도향이형이 세환이한테 귀신얘기를 했어요. 아니, 운동하자고 만나서 귀신얘기는 왜 하냐고, 글쎄. 안 그래요? 괜히 세환이네 집에 가서는 말이야, ‘야, 네 집에 귀신이 몇백 마리 있다. 이렇게.’ 그거 다 구라거든. 세환이는 당연히 기분이 나쁘지. 그래서 영남형한테 얘기를 했나봐. 내가 미국에 가서 영남형을 봤는데 영남형이 ‘니들 하는 운동 한번 해봐’ 그러더라고. 그래서 했더니 ‘구라 치지 마, 임마’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나도 ‘아니, 왜 가만있는 사람 불러다가 구라 치지 말라고 그러냐’ 그러면서 한번 붙었지. 뭐 그런 거예요.”

▼ 묘한 관계네요.


“좀 이상한 얘기지만, 난 사실 이상한, 오래전 일도 기억해낸다고요. 내가 영남형하고 어땠냐? 전생에는 어땠냐? 전생의 전생에는 어땠나?”


▼ 전생을 기억하세요.


“그럼요. 그때도 다 기억을 한다니까. 극도의 명상을 하니까. 물론 착각일지 모르지만, 그러면 ‘아~ 그 형이 전생에 내 가정교사를 한 적도 있지’ 이런 생각을 한다니까요. 그래도 도움이 된 가정교사. 하필이면 (조영남씨에게 맞았을 때, 칼 쓰는) 그놈들이 올 게 뭐야. 주먹쟁이들이 왔으면 그냥 패는 건데.”(웃음)


▼ 만약 패버렸으면.


“그랬으면 난 또 건달세계로 가는 거지. 양아치 세계로.” 

운명의 1976년 12월31일


▼ 부인과는 고등학교 동창이죠.


“예, 우리 집사람이 쌍둥이에요. 동생. 쌍둥이가 둘 다 예고를 나왔죠. 언니는 무용과, 집사람은 미술과, 나는 성악과.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어요. 탁구 치면서 친해졌지. 근데 나는 너무너무 가난해서 먹을 게 문제였었는데 무슨 여자야. 여자는.”


▼ 그럼 어떻게 결혼하신 거예요.


“가수가 된 다음에, 1975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연을 하는데 그 언니를 만났어요. 너무 반가워서 ‘니 동생은 뭐 하냐’ 그러니까 한국에 있다는 거예요. ‘한국에서 골동품 장사를 한다’는 거야. 그렇게 찾아갔어요. 이태원에. 근데 가보니 벌써 이건 내 상대가 아닌 거예요. 우리 같은 애 상대할 경력이 아니었어요. 완전 상류사회 경력이니까. 스튜어디스 출신인데, 그것도 미국 정보부 비행기 스튜어디스니까. 영국 왕실학교 가서 교육도 받고. 우리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거지.”


▼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내가 알던 사람 중에 박동선이라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옛날 미국에서 로비하다가 문제가 됐던. 내가 그때 집사람한테 박동선씨를 소개해줄 생각이었어요. 박동선씨가 그때 미국에서 아주 성공한 사업가였거든요. 근데, 집사람이 이미 나한테 마음이 있었는데 난 그걸 몰랐지 뭐예요.”


박동선씨는 한미 간 외교마찰을 불렀던, 1976년 발생한 일명 ‘코리아게이트’의 주인공이다.


▼ 두 분이 가까워진 계기가 있었을 텐데요.


“1976년 12월31일 날, 미8군에서 파티를 했는데, 집사람이 나한테 파트너를 하나 소개해달라는 거예요. 파티 호스트가 정일권 국회의장이었는데. 난 마음속으로 박동선씨를 생각했죠. 박동선씨는 그때 호랑이가 날개를 단, 그런 사람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옆에 앉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내가 약속을 못 지켰어요. 그래서 대신 내가 갔지. 다음날 대구에서 공연이 있었는데도.”


▼ 파티에서 두 분이 드디어….


“밤 12시가 되니까, ‘땡땡땡’ 하고 종이 울리는데, 이게 파트너와 키스하라는 종이거든요. 근데 내가 그때 집사람한테 어떻게 키스를 해. 그래서 엉거주춤 있는데 집사람이 ‘나한테 키스해’ 그러더라고. 그때 알았지. ‘얘가 나를 남자로 생각하는구나’ 하고.”

▼ 그렇게 연애가 시작됐군요.


“다음날 대구에 내려가야 되는데, 진짜 가기가 싫은 거야. 이렇게 훌륭한 애가 날 좋아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남다르게 훌륭했거든요. 아무튼 어딜 가도 확 빼어난 여자였거든요. 나중에 내가 명상을 해보니까, 전생을 떠올려보니까, ‘아~ 이게 우리가 한두 번 부부가 아니었네’ 생각이 들더라고. 집사람도 그러더라고. 언젠가 내가 ‘마이 웨이’를 부르면서 걸어오는 걸 TV로 보는데, 그 옆에 자기가 서 있더래요. 신부 옷을 입고.”


▼ 그런데 대구는 가셨어요?


“갔지.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여기 내려오라고 했지. 그 다음부터 불이 붙었지. 한 보름간 불이 붙었다가 바로 구혼하러 갔지, 집사람 집으로.”


▼ 보름 동안 부인을 집에 안 보내신 건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러지는 못했고. 난 사실 결혼 안 하는 주의였거든요. 평생 혼자 살겠다는 주의였었다고. 근데 그때 잠깐 잊어버렸지.”


▼ 부부싸움은 안 하세요?


“많이 했죠. 난 부부싸움도 스포츠처럼 하거든요. 싸울 만한 일이 생기면 열심히 싸우는 거지. 대신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하지는 않아요. 뭐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야, 얘 퇴학시켜라


▼ 부인을 위해 수상가옥도 짓고 계시다고.


“영남형이 그랬지. 근데 영남형은 우리 집에 와보지도 않았어요.”


▼ 지금도 집을 짓고 계세요?


“아직 완성은 안 했으니까. 땅 700평을 사서 집을 지으려고 마음먹었는데, 집을 지어줄 사람이 없는 거야.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가가 내 친군데, 난 그 친구의 집도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왜냐? 예쁘긴 하지만 한국 사람에게 안 맞는 거야. 그래서 내가 건축 공부를 했어요. 한 5년 동안. 내 집 지을려고.”


▼ 아~ 화장실에서 하루 한 시간씩.


“아니, 그때는 화장실에서만 한 건 아니지. 서적을 사다가 제대로 했지. 나 지금 건축사 해도 돼요. 시험 봐도 안 떨어질 걸? 설계를 해서 그 친구한테 도면으로 그려줘라 그랬지. (개울가에 있어서) 비 많이 오면 정말 끝내줘요.”


▼ 들어보니 아들을 학교에 안 보내셨다고.


“큰아들 송결이 얘긴데, 안 보낸 게 아니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가 바빠서 학교 갈 시간이 없었지.”


▼ 고1 학생이 뭐하는 데 바빠서 학교를 못 가요?


“컴퓨터 하느라고 학교 갈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 성적은 톱이었는데, 다들 ‘하남에서 서울대 학생 하나 나오네’ 그랬다고. 기대를 왕창하고 있었는데. 컴퓨터 게임 만드는 거 하느라고. 그래서 생각해보니 나도 고등학교 2학년 중퇸데 뭐, 잘 사는 데 뭐, 그래서 ‘맘대로 해’ 그랬지. 집사람한테 ‘야, 얘 퇴학시켜라’ 그랬더니 집사람이 학교 가서 바로 퇴학시켰어요.”


▼ 부인도 동의를 하셨나요?


“나랑 비슷해요, 집사람도. 단지 나보다 생각이 좀 고급스럽고 우아 쪽으로 간다는 거지. 나랑 생각하는 게 똑같아요. 송결이 걔 유명했어요, 인터넷에서. 지금은 게임회사에 다녀요.”

▼ 송창식 하면 딱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또 옷인데요. 개량한복.


“이거 1984년쯤부터 입었어요. 왜 그랬냐면, 가수왕 되고 나서 1976년에 홍콩에서 열린 아마추어 가요제에 갔는데, 가면서 최고로 좋은 양복하고 한복을 한 벌씩 가지고 갔다고요. 근데 가보니까, 내가 제일 후줄근한 거야. 전면 거울이 있는 방에서 열린 리셉션이었는데,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말이야. 아주 기분 더럽더라고. 그래서 다음 날엔 한복을 입었는데, 그때 거기 모인 총 인원 중에 내가 제일 멋있는 거야. 빼어나게 멋있는 거야.”


▼ 기분 좋으셨겠네요.


“그렇죠. 숙소에 돌아왔는데 별생각이 다 들더라고. 이게 한복 때문이냐, 아님 내 몸에 문제가 있는 거냐. 그래서 복식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했어요. 그 공부도 몇 년 했지.”


송창식은 뭔가에 한번 꽂히면 기본적으로 몇 년씩은 파고든다. 빙빙 도는 운동도 그렇고 건축공부도 그렇다. 복식공부도 마찬가지다. 좀 다른 얘기지만, 그는 자동차도 한 종류만 탄다. 벤츠. 그것도 중고로만, 1982년에 처음 샀는데, 성능에 매료되어 7번이나 중고 벤츠를 샀다. 타다가 폐차하고 또 샀다. 뭘 하든 끈기가 좋다. 옷 얘기를 더 들었다.


“내가, 결혼한 뒤에 집사람한테도 연구를 시켰는데, 어느 날인가는 집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거야. 실제로 만들었는데 입을 만하더라고. 그렇게 나에게 맞는 옷본이 만들어졌죠. 근데 옷 만드는 프로들은 그 옷본을 보고는 자기들은 ‘못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결국은 보광동에 있는 세탁소 아주머니를 찾아갔어요. 아주 똑똑한 아주머니야. 척 보더니 ‘되겠는데요’ 그러는 거야. 물건이 나왔는데 아주 마음에 들더라고요.”


부인이 만든 첫 작품은 호피무늬 비슷한 천으로 만든 개량한복이다. 송창식은 이 옷이 지금도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의 개인 스튜디오 벽면에는 이 옷을 입고 찍은 가로 2m가 넘어 보이는 독사진이 떡~ 하니 결려 있다.


▼ 그 보광동 아주머니가 무대의상을 얼마나 만드셨어요.


“100벌 좀 안 되게 만들었지. 난 그 아주머니가 만든 옷만 입었으니까. 근데, 그 아주머니가 돈을 많이 벌었어요. 내 옷 만들면서 쌓은 노하우로 기념품용 한복을 만들어 귀국하는 미 8군 군인들에게 팔았거든요.”


▼ 보광동 아주머니는 어떻게 알게 됐는데요?


“김도향씨가 ‘우리 동네에 아주 똑똑한 아주머니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어요. 1984년부터 아주머니가 만들었지. 7~8년 전까지 만들어줬으니까.” 

대마초 사건으로 오해받아


▼ 1976년쯤 연예인 대마초 사건 때 오해를 많이 받으신 걸로 아는데요.


“난 대마초 피는 사람들 말리는 사람이었어요. 보건사회부 취조실에 끌려갔는데, 갑자기 ‘불어, 이 새끼야’ 그러더라고. 기분이 나빴지. ‘다른 사람 다 해도 난 안했다’고 했죠. 그런데 취조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 대마초 피우는 건 봤어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네, 봤어요’ 그랬지.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래요? ‘나 서울신문사 기자요’.”


▼ 딱 걸렸네요.


“졸지에 내가 대마초 피우는 연예인을 분 사람이 된 거야. 사실은 내가 갔더니 이미 길쭉한 종이가 일렬로 있는데, 거기에 다 명단이 있더라고. 김OO, 박OO 같은 대마초 골초들이 다 있더라고. 나중에는 ‘내가 가수 정훈희랑 동거한다’는 소문 때문에 날 잡아왔다는 거야. 정훈희 잡을라고. 그러더니 또 윤형주를 잡아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랬지. ‘형주는 장가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마누라가 애도 뱄는데 무슨 대마초냐’고. 그랬더니 윤형주 집 아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어느 어느 아파트에 산다고 했는데, 형주 집 서랍에서 대마초가 나왔지 뭐예요. 가지고 있던 것 중 절반은 이장희한테 주고 나머지를.”

자신의 앨범을 들어 보이는 가수 송창식. 손에 들고 있는 것은 ‘하얀 손수건’이 들어 있는 트윈폴리오 시절의 앨범.

▼ 오해받을 상황이었네요. 

“더 나쁜 게 있어요. 이때부터 취조하는 사람들이 잡아온 애들한테 ‘송창식이 지금 활동하지, 그러니까 너도 불어’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런 게 모두 오해의 소지가 된 거야. 그러고 나니까 나중에는 별 놈들이 다 나한테 와서 ‘야, 붙자’ 그러는 거야. ‘내가 언제 너하고 대마초 했냐’면서. 근데 진짜 대마초 골초들, 나한테 붙자고 하면 안 되는 놈들이 그렇게 찾아와서 붙자고 그러더라고. 참, 미치겠데. 명단은 분명히 걔들한테서 나왔을 텐데. 그때부터 내가 홍콩 같은 곳으로 외유를 다니기 시작한 거예요.”


▼ 하여간 그때 다들 들어갔잖아요. 윤형주, 김세환, 이장희 같은 친한 분들이.


“장희는 안 들어갔어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고. 형주한테 받아놓고 ‘니가 나 언제 줬냐’고 우겼지. 걔가 똑똑한 놈이지.”


송창식은 대마초를 딱 한번 피워봤다고 했다. 1968년인가 내한한 피스코라는 미국 평화봉사단원들을 통해서 대마초를 알았단다. 피스코가 사실은 미국의 농산물 스파이 조직인 것을 나중에 알았다. 피스코 사람들은 대마초를 해피스모크라고 불렀다. 딥퍼플 같은 세계적인 그룹이 공연을 하면서 이 해피스모크를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동했다. 그래서 노는 친구들을 불러다가 같이 피워봤다. 그는 대마초를 피운 환각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종의 마비증상이 오는데, 9겹의 피부가 한 겹씩 붕붕붕 뜨는 거예요. 내가 뭐라고 말을 하면 9번을 말하게 되는 거야. 메아리치듯이. 그리고 기타를 한번 쳤는데, 너무너무 좋은 거야. 9배로 좋은 거야. 한번 땡~ 치고 너무 좋아서 7번을 치는 거예요. 자기 뻑이지.” 

▼ 그런데 정훈희씨와는 오해 살 만한 일이 있었나요?


“특별히 친했죠. 내가 너무 예뻐했지. 노래를 제일 잘하니까. 노래 잘하는 가수는 그 사람 하나였어. 패티김 같은 사람들도 다 정훈희만 못했어요. 다른 사람은 다 음정 박자가 틀렸고 정훈희만 맞았다고.”


▼ 사적으로도 친했나요?


“친하죠. 난 정훈희 끼고 살았는데. 1975년에 가수왕 받고 나서 전국 투어 다닐 때 내가 정훈희를 데리고 다녔지. ‘중다마’로, 내가 ‘아다마’고, 정훈희가 노래를 제일 잘하니까.” 

방위 때 음악세계 정립


▼ 두 분 사이에 ‘썸씽’이 있었겠는데요.


“공개된 장소에서 끌어안고 했으니까 오해를 샀지. 진짜 남자로서 좋아했어요. 행위만 안 했을 뿐이지, 여자를 책임질 수 없었기 때문에. 정훈희한테 ‘우리 평생 결혼하지 말고 사랑하면서 살자’ 그랬는데, 내가 먼저 장가가면서 깨졌지.”


▼ 1970~80년대 한마디로 정부에 찍힌 가수였는데.


“방송금지곡이 많았죠. 찍힌 진 오래됐고. 내가 군대도 갈 게 아닌데 갔다니까. 난 부모 없는 3대 독자로 군대 면제 케이슨데 특수자라고 해서 잡혀간 거지. 7개월 방위였지만. 그런데 방위 가서 음악이론을 정립했어요. 내가 음정 박자가 안 맞는다는 걸 그때 알았으니까. 내가 방위 때 의가사제대를 시키는 부서에서 일했어요. 그래서 내가 나부터 의가사제대를 시켰지.(웃음) 거기서 전부 버렸어요. 그 동안의 내 음악을.”


▼ 무슨 계기가 있었어요?


“어느 날 내가 AFKN을 보는데, 아마추어 노래자랑이 있었어요. 그걸 봤지. 근데 노래를 듣다가 보니까 내가 그놈들만도 못한 거야, 글쎄. 한심스럽더라고. 너무 쇼크 먹었지 뭐예요. 한 일주일 간은 ‘내가 병신인가, 어디가 모자란가’ 생각하며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생각한 게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게 뭔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국악과 뽕짝을 이론적으로 파기 시작한 거예요.”

▼ 그래서 처음 만든 노래가 뭐였어요? 

“‘피리 부는 사나이’지. 히트를 했어요. 대중가요 같지도 않은데 히트를 했지. 처음 나온 형식의 노래였지. 그러고 나서 바로 ‘한번쯤’이 나왔지. 영화음악으로 ‘왜 불러’하고 ‘고래사냥’이 나오고.”


▼ 서로 아주 다른 노래들인데요.


“피리 부는 사나이, 왜 불러는 뽕짝이고, 고래사냥은 록이고, 달라요. ‘왜 불러’는 ‘아니 안~ 되지, 돌아서면 안 되지, 쿵짜짜쿵짜’ 이렇게 나가잖아. 내 뽕짝은 일단 뒤에 악센트가 붙는 게 달라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히트한 건 아니에요. 서양식이 아니고 우리식으로 해서 히트한 거지. 음정은 틀려도 알고 틀리니까 공감을 얻은 거예요. 한마디로 대중하고 똥창이 맞은 거지. 그전에는 노래를 잘했지만 대중하고 동떨어진 음악이었거든. ‘한번쯤’‘고래사냥’도 다 그랬어요.”


▼ 그럼 변화된 송창식을 완성시킨 노래는요?


“완성곡은 아직 발표 안 했고, 가장 비슷한 건 ‘가나다라’예요. 이것도 똥창이 맞으니까 사람들이 좋아한 거예요. 우리 정서에 맞는 거지.”


▼ 군대 가길 정말 잘하셨네요.


“그래서 세상에 나쁜 일은 하나도 없다니까요.”


▼ 돈은 좀 버셨어요?


“난 돈 버는 일은 거의 안 했어요. 업소에서 노래도 안 하고. 별로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집사람이 사업하고 그랬지. CF도 안 했어요. 내가 선전할 만한 상품도 없어. 뭘 선전해 내가, 돈이 너무너무 필요하면 한 번은 할 거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돈이 너무너무 필요한 적은 없었어요. 그리고 일단 상품이 자랑스러워야지.”


▼ 어떤 상품이라면 ‘한번쯤’ 하시겠어요?


이 질문을 던지자 송창식은 느닷없이 세제 얘기를 꺼냈다. 빨래할 때 쓰는 세제. 한 발명가가 대단한 발명품을 만들었는데, 대기업 땜에 회사가 망가졌다고. 이름이 콜로이드라고. 전문적인 얘기여서 이해가 안 됐지만, 하여간 획기적인 친환경 상품이라는 것이다. 송창식은 그런 거라면 ‘한번쯤’은 할 수 있다고 했다. 인류와 국가를 위해. 껌이나 과자는 몸에 나쁘다면서.


▼ 가수말고 다른 일을 생각한 적은 없어요? 정치 같은.


“국회의원 제안도 2번 받았어요. 높은 사람이 찾아왔어요. 그런데 난 아직 내 음악이 바닥이 안 나서 못 한다고. 난 내 음악의 끝을 봐야 되겠다고 했지.”


▼ 장사도 안 해보셨고.


“나는 돈 벌 마음이 없다니까요. 얘기 했잖아. 난 돈 벌 생각이 없다고.”


▼ 신곡을 안 낸 지가 오래되셨는데. 

“메모만 해놓고 안 쓴 게 한 1000곡 정도 되는데, 예전에 우리는 10만장이 나가면 대박이었다고. 그런데 요즘은 20만장이 나가면 밑지는 장사가 된다고 하더라고. 야~ 난 목표가 10만장인데. 그럼 내가 이 짓을 왜 하는 거냐? 그런 생각이 든다고. 그래서 이제는 판을 파는 장사는 안 하려고 해요. 나한테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내가 노래 부르고 사람들이 듣고, 같이 숨쉬는 거예요. 그거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