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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 인터뷰 본문

Chisme/Interviews

송창식 인터뷰

WhiteApple 2011. 2. 20. 02:12

왜 불러
'세시봉' 인기? 난 실감 못하겠네요 우린 그동안 쭉 그대로 있었는데…

나는 '노래'하는 사나이
27살 때 미군 방송 보고'나보다 잘하는 사람 천지' 충격
분하고 분해 일주일을 엉엉 울어…그 후 동·서양 음악 접목한 나만의 음악 만들었어요

"미발표곡 1000곡… 젊은 팬이 원한다면 홍대클럽에라도 설 것"

송창식(64)을 만나보고 싶었던 것이 작금의 '세시봉 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조영남이 쓴 칼럼에

"송창식은 외계인이므로 일상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부터 궁금증이 일었더랬다.

그러나 송창식은 신곡을 발표하지도 않았고 특이한 사건을 벌이지도 않았으므로, 그를 만날 계기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외계인을 만나는 데 계기가 필요한가. 이 천재(天才) 또는

기인(奇人)과의 만남은 지난 15일 오후 5시 경기 하남 미사리에 있는 한 카페에서 이뤄졌다.


―'세시봉 남자들' 인기가 보통 아닙니다.

"나는 실감 못하겠어요. 우리는 그동안 쭉 있었는데 갑자기 처음 나온 것처럼…. TV 앞에 젊은 애들뿐 아니라

부모들이 함께 앉아 경청했다는 놀라움 정도 아닌가요."

―'세시봉' 첫 무대에서 아리아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른 이유는 뭡니까.

"아는 팝송이 하나도 없었어요. 팝송은 음악으로 안 쳤으니까. 그래서 클래식을 한 거죠. 그 뒤에 윤형주와

이익균을 뽑아 '트리오 세시봉'을 만들었죠. 그런데 이 두 친구가 클래식을 할 마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두 사람한테 맞춘 거죠."

―팝송은 음악으로 치지도 않았다면서요.

"그때 이화여대 강당에서 조영남씨 공연을 봤어요. 조영남씨가 톰 존스의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을 불렀는데 깜짝 놀랐어요. 팝송도 굉장하네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팝송에 불이 붙은 거예요. '이걸 해야겠다' 생각하고 굉장히 음악을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트윈폴리오가 만들어졌죠."

―왜 그렇게 금방 해체했나요.

"사실 결성할 때 '윤형주는 의대생이니까 관둘 것이다'라고 생각했어요. 1969년 초에 '하얀 손수건' 음반을

낸 뒤 리사이틀을 앞두고 기자회견 하는데 윤형주가 '이번을 마지막으로 트윈폴리오는 끝이다'고 말하는

거예요. 나하고 상의도 안 하고. 트윈폴리오가 인기 최고이니까 돈도 좀 벌어야 했는데….

그 뒤에 솔로로 데뷔한 거죠."

 디지털 기기와는 별 상관없을 것 같은 이미지의 송창식은 사실‘얼리 어댑터’이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애플 컴퓨터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의 집도 직접 컴퓨터로 설계한 것이다.
그는“내 이미지와 좀 안 맞는 것 같지만, 사실 음악 빼고 가장 자신 있는 과목이 수학이었다”며 웃었다.
 /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트윈폴리오 재결성 공연 소식이 계속 들리던데요.

"그게 잘 안돼요. 만족할 때까지 연습을 해야 하는데 윤형주는 자기 사업을 하는데다 교회 장로니까
지방도 다니고 외국도 다니고…. 연습할 시간이 없어요. 올 10월에 한다는데, 그때 가봐야 알죠."

―조영남씨가 "송창식 묘비명은 '연습하다가 죽다'로 써주겠다"고 했다면서요.

"그 사람들은 연습의 의미가 뭔지 몰라요. 나에게 연습이란 건 스님들이 수련하고 좌선(坐禪)하는 것과 똑같은
의미예요. 스님들이 나이 먹었다고 좌선 안 하나요. 나는 노래를 잘하기 위해서 연습하는 게 아니고 인생 내내
공부로 연습하는 거예요."

―그 연습이 언제 시작됐습니까.

"인천중 2학년 때 경기도 음악콩쿠르에 학교 대표로 나갔는데 1등 없는 2등을 했어요. 제일 잘했으면 1등을
주지 1등 없는 2등은 뭔가 했었죠. 그 뒤로 제물포고를 안 가고 서울예고 성악과로 진학했죠.
그런데 예고에 가보니까 내 노래는 노래가 아닌 거예요. 노래 부르는 패턴이 있더라고요.
왜 2등을 줬는지 금방 이해가 됐어요. 음악이라는 게 필기 공부처럼 하나의 공부구나,
평생 해야 하는 수련이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거죠."

―서울예고는 왜 중퇴했습니까.

"예고에선 실기 80점 미만이면 낙제인데 학생마다 레슨 선생한테 따로 돈 내고 배우고 그 선생님이 실기시험을
 추천하게 돼 있어요. 1학년 1학기 때는 유명한 테너였던 선생님이 무료로 가르쳐줬는데 이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어요. 2학기 때부터 레슨비를 못 내니까 가르쳐줄 선생님이 없었고, 자연히 실기시험을 못 보게 됐죠.
 2학년 2학기 때까지 실기가 계속 빵점이니까, 학교에서 유급 통보 엽서가 왔어요. 그 길로 학교에 안 나갔죠."

송창식의 부친은 그가 세 살 때이던 1950년 6·25 전쟁에서 전사했다. 3년 뒤 모친은 그를 할아버지 집에
맡기고 가출했다(훗날 송창식이 유명 가수가 된 뒤 재회했다). 그는 할아버지와 삼촌 집을 전전하며
학창생활을 보냈다. 서울예고 재학시절 그는 군경유자녀 학비보조금, 학교와 서울시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으나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고 했다.

―지휘자 금난새씨가 고교 동창이죠.

"반은 달랐지만 남학생이 10명밖에 되지 않았으니 알고 지냈죠. 난새는 얌전하고 뒤로 물러나서 관망하는
스타일이어서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어요. 나는 말썽꾸러기였고."

―금난새씨처럼 지휘자 되는 게 꿈이었다면서요.

"내게 좀 특별한 능력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때 악보를 쓰고 읽을 줄 알았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무슨 시향(市響)이 인천여상 강당에서 공연했는데, 손끝으로 오케스트라를 움직이는 지휘자가 너무나
멋있는 거예요. 그때 나는 '지휘자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초등학교 1학년 때 채보(採譜)가 가능했다는 건가요.

"채보도 가능하고 생각난 멜로디를 악보로 그릴 수 있었고, 그걸 보고 노래할 수도 있었죠."

―그런 재능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노래하는 걸 워낙 좋아했는데 초등학교에서 처음 음악책을 봤어요. 1학년 음악책부터 3학년 음악책까지
본 뒤에 4학년 음악책을 보니까 콩나물 대가리 밑에 '도레미파'가 써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계명으로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혼자 터득한 거죠."

 "신곡 언제 내느냐"고 재차 묻자 송창식은“언젠가는 낼 거다. 세월이 좀먹느냐”고 말했다. / 채승우 기자
―취학 전부터 노래를 좋아했나요.

"우리 어머니 말씀이 내가 어렸을 적에 안 보이면 동네 라디오방 앞에 가 있었대요.
노랫소리 나는 곳에 늘 있더라는 거죠. 그때 따라불렀던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아직도 기억해요.
 '백두산 줄기줄기…' 뭐 이런 노래죠. 초등학교 1학년생이 악보를 쓰고 읽으니까 사람들이 '너 모차르트구나'
해서 '그게 뭔데요' 하니까 서양의 음악 신동이래요. 그래서 '그럼 내가 모차르트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죠."

―서울예고를 중퇴 않고 대학까지 나왔으면 지휘자가 됐겠군요.

"유학까지 갈 수 있었다면 당연히 지휘자가 됐겠죠. 그러면 내가 정명훈보다도 먼저죠."

―정명훈 이상의 세계적 지휘자가 됐을까요.

"그럼요. 나는 고등학교 때 이미 공부가 뭔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지금 그때로 돌아가라고
하면 안 하죠. 지금 하는 음악이 너무 좋으니까."

―군대 있을 때 음악적으로 큰 깨달음이 있었다던데요.

"그게 운명이에요. 지금 생각하면 예고 중퇴한 게 대중음악 하기 위한 길막음이었던 것 같아요.
27세 때 병무청에서 7개월 방위 복무를 했는데 그때 미군방송(AFN)에서 흑인 아마추어 노래경연대회를
봤어요. 근데 나보다 잘하는 놈들이 정말 많은 거예요. 그때부터 외국 노래와 내 노래를 비교하니까 내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어요. 너무 분했고 큰 충격이었죠."

"일주일간 펑펑 울면서 '나는 바보인가' 했죠. 울다 울다 지쳐서 넋이 반은 나갈 정도였죠. 그러다가 또 TV에서
전주대사습놀이를 보는데 거기 장원과 차석이 또 나보다 훨씬 잘하는 거예요. 그래서 분석을 시작했죠.
서양 음계는 고대 수학자인 피타고라스가 정리한 거예요. 그런데 국악을 분석해보니 꼭 그걸 따를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죠. 그동안 배운 걸 모두 버리고 나만의 음악 이론을 만들었어요. 지금 내 음악에 비하면
서양음악은 아주 하잘것없는 음악이죠. 바흐·베토벤·브람스·모차르트 모두 기능적으로는 훌륭한 음악을
했지만 한 70점쯤 되는 음악이에요. 동양 음악도 똑같은 음악인데 그걸 몰랐으니까. 내가 클래식을 했다면
이런 이론은 만들 수가 없어요. 내 음악은 100점짜리 음악이에요."

―그 이론을 만든 뒤에 음악이 달라졌나요.

"동양과 서양의 요소가 모두 있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거죠.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언제나 웃는 멋쟁이"
부분이 국악이에요. 그렇게 한 소절, '왜 불러'에서 두 소절, '고래사냥'에서 세 소절 식으로 국악을 점점 많이
도입한 거죠."

―그래서 음악이 독특해졌군요.

"그렇죠. 사람들은 왜 그런지 몰랐지만 어쨌든 달랐고 쇼킹했죠. 그러니까 천하에 없는 명성을 준다 해도
클래식으로는 안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 이론을 전수하고 있습니까.

"그러고 싶었지만 안 돼요. 음악을 하려면 자신보다 잘하는 놈이 있다는 걸 분하게 생각하고 울어야 하는데,
다들 자기가 최고인 줄 알아요. 몇몇 후배들한테 외국 가서 음악공부 하고 오라고 권하기도 했죠.
외국 다녀오면 자기 자신한테 실망하고 분해서 돌아와야 하는데, 최고인 줄 알고 돌아온다니까."

―책으로 남기면 전수가 되지 않을까요.

"그게 참 묘한데 책은 물론이고 어록으로 남겨도 나중에 악용돼요. 후배들이 그 책을 보고 모르면서 아는 척
가르치거든요. 인류 역사상 책으로 나온 게 쓸모가 별로 없어요. 책으로 뭔가 쓰면 안 썼을 때만 못한 거예요.
공자가 '춘추(春秋)'를 썼는데 조선시대 때 그놈의 '춘추'가 양반들에 의해서 얼마나 악용됐습니까.
노자가 쓴 '도덕경(道德經)'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로 하여금 괜히 세상에 무관심하게 만들어 후대에
체제 유지를 위해 악용됐지, 아마."

인터뷰가 미궁(迷宮) 입구에 다다르고 있었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이 "가왕(歌王) 조용필에 대적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가수"라고 칭송했던 송창식은 지금 '도덕경'의 첫 구절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더 이상 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남자, 지금 조용필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과 대적하고 있다.

―악용될 게 두려워서 책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두려운 게 아니라 꼭 악용된다니까요. 좋은 건 흘러가도록 놔둬야 해요. 공자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살면
되잖으냐' 하고 얘기하거나 '너 왜 그래?' 하면서 뺨이나 한 대 때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다 책으로 쓰니까
문제를 일으키잖아요."

―'춘추'나 '도덕경'을 다 읽었습니까.

"안 읽었죠. 들어서 대충의 내용은 알아요. 그렇게 중요한 내용은 쓰면 안 되는 거예요. 농담은 써도 돼요.
중요할수록 쓰면 안 돼요."

―그건 문학을 포함하는 겁니까.

"아니죠. 문학은 농담이니까."

―이 인터뷰 기사가 나가면 시끄러워지겠군요.

"(껄껄 웃으며) 다들 나를 욕하겠죠. 모든 소설은 농담이라고 했으니. 그래서 음악 이론도 발표하지 않는
거예요."

―책은 많이 읽습니까.

"닥치는 대로 읽어요. 그렇지만 무슨 영향을 받지는 않아요. 모두 픽션이라고 생각하고 읽는 거죠.
'도덕경'도 나한테는 픽션이에요."

화제를 바꾸는 게 나아 보였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 인터뷰도 절대로 쓰지 말라"고 주문할 것 같았다.

―노래는 무엇입니까.

"노래는 인생 자체예요. 이 우주에서 흐르는 모든 물리적 법칙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거라고요. 어떤 소리를
내든지 간에 그것만의 이치대로 딱 맞게 내야 돼요. 노래 부르는 도중에 막 흥분해도 한편으론 다른 내가
있어서 노래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여력이 있어야 발전이 돼요. 그게 바로 명상이에요. 삼라만상에 들어가
있으면서 또 다른 내가 '아, 저렇게 삼라만상에 들어가 있구나' 할 때 그것이 명상이고 좌선이며 노래죠."

―특이한 운동을 한다던데요.

"빙빙 돌아요. 일어나자마자 방 안에서 두 시간 동안 빙빙 도는 게 내 운동이에요. 앉아서 하는 게 좌선이고
서서 하는 게 입선(立禪)인데, 그런 명상 상태가 되면 몸이 휙휙 도는 컨디션이 돼요. 그때 몸에 모든 걸
맡겨놓으면 그게 운동이에요. 태극권이 그래서 생겨난 거죠."

 한국 포크의 선구자로 한창 활동하던 때의 송창식(맨 아래). 그 위는 윤형주와 김세환이다. /
―밤에 활동하고 낮에 잔다면서요.

"가수 데뷔하던 1968년부터 43년째 그러고 있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가장 조용할 때 음악을 만들고
연습하던 습관이에요. 보통 새벽 5시에 자고 낮 2시에 일어나요."

―일출(日出)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일출을 어떻게 봐요. 해(태양)도 못 보는데."

―낮 2시에 일어나면 해는 볼 수 있잖습니까.

"그때부터 2시간 운동하고 3시간 연습하니까, 저녁 7시나 돼야 밖에 나와요."

―골프 칩니까.

"안 칩니다. 그런데 TV는 거의 골프 채널만 봐요. 타이거 우즈가 아마추어로 우승할 때부터 쭉 봤죠.
국내외 선수 이름과 우승 경력은 다 꿰고 있어요."

―골프 보는 걸 좋아하면 한 번쯤 해보고 싶을 것 같은데요.

"우리나라에서 골프의 속성이 별로 안 좋잖아요. 사치 운동이잖아. 운동도 아니고 게임이지.
그런 걸 한 번 하면 몇 시간씩 소모되는 거, 그걸 왜 손대겠어요."

송창식은 1987년 경기 광주 퇴촌면에 땅 3305㎡(약 1000평)를 구입해 그 중 430㎡(약 130평) 대지에
지하 1층·지상 2층짜리 집을 짓고 살고 있다. 연건평은 330㎡(약 100평) 규모다.

―큰아들(송결·33)도 고교를 중퇴했다고 들었습니다.

"걔는 나보다 먼저 중퇴했어요. 고1까지밖에 안 다녔으니까. 학교 다닐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게임하느라고."

―안 말렸습니까.

"왜 말려요. 게임 전공할 건데(그의 큰아들은 게임회사인 엔씨소프트에 다니고 있다)."

―돈을 꽤 벌었을 것 같습니다만.

"나는 일정 정도 돈이 생기면 더 이상 돈을 벌지 않아요. 내가 필요한 만큼만 돈이고 남는 돈은 쓰레기예요.
물론 벌려면 벌 수 있었죠.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어요. 천국에 가려면 죄가 없어야 되고 돈도 없어야 돼요. 천국에선 둘 다 필요 없으니까.
죄는 사실 돈보다 가벼워요. 죄를 가진 사람은 죄를 버리고 싶어하는데 돈 가진 사람은 버리지 않으려고
하잖아요."

―주 수입원이 무엇입니까.

"저작권 수입이 1년에 1억원쯤 될 겁니다. 저작권협회에서 25%를 떼면 7500만원쯤 될까요. 그건 우리
집사람이 사업한다고 써요. 나는 공연 수입으로 먹고사는데, 작년까진 수입을 잘 맞췄는데 올해 골치 아플 것
같아요. 공연이 많이 잡혀서 수입이 너무 많아질 것 같아요."

―그게 골치 아픈 일입니까.

"올해 수입이 많아지면 세금을 많이 낼 텐데, 내년엔 수입을 맞추느라고 공연을 덜 할 거거든요.
그러면 세금 처리가 복잡해져요."

송창식은 술·담배도 일절 하지 않는다. 고교 졸업 후 잠시 마셨으나 이내 끊었다. 그는 혈기왕성하던 시절에
술이 쉽게 끊어지더냐고 묻자 "내가 나를 컨트롤하겠다는 데 뭐가 어려우냐"고 답했다.

―왜 더 이상 신곡을 발표하지 않습니까.

"1989년에 마지막으로 음반 낼 때 10만장을 팔았습니다. 90년대 넘어가면서 100만장씩 파는 후배들이
나왔어요. 걔들은 20만장 팔면 밑진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목표가 10만장인데 얼마나 속상해요.
편곡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도 10만장 팔아봐야 손해라는데 어떻게 음반사에다가 앨범 내달라고 하겠나
하는 생각에 머뭇거렸죠. 그런 생각에 계속 못 낸 거예요."

―곡은 많이 써뒀습니까.

"미발표곡이 1000곡쯤 돼요. 그렇지만 음반을 낸다면 새로 곡을 쓰게 될 거예요."

―송창식이 신곡을 안 내는 것은 책임 방기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많죠. 그렇지만 사람들 앞에서 같이 호흡하고 노래하는 게 내 일이에요.

지금 내가 '왜 불러'를 부르면 신곡이라고요. 신곡을 내는 건 제작자의 몫이지 가수와는 상관이 없어요."

―홍대 앞의 클럽에서도 공연할 수 있나요.

"거긴 젊은 애들 오는 덴데 누가 날 원하겠어요."

―젊은 관객들이 원한다면요.

"원한다면 물론 설 수 있죠. 카페에서도 노래했는데 클럽에서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송창식은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 하나 이렇게/
밝혀놓으셨나요" 하고 노래한 로맨티스트였으며, 엄혹한 유신 말기에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8)을 녹음해 준 뒤 중앙정보부에서 들이닥치자
"그게 무슨 노래였는지 내가 알게 뭐냐"고 대꾸한 걸물(傑物)이었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이 사람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특유의 개량 한복을 입은 그는 "구리의 스튜디오에 가야 한다"며 카페 밖에 세워둔 먼지투성이 벤츠에
올라탔다.